공부에 관련해서, 고양국제고 입학 후 가장 기뻤던 순간을 세 가지 정도 꼽으라면 아마...
1. GGHS Time Table을 비롯한 C# / XAML 앱 개발
2. 사회탐구방법 실험연구 진행 (Project Cylinder)
그리고 마지막, 지금이다.
3. 수리면접 준비를 위한 기하 및 화학 공부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지 못한다. 2015 개정 교육과정 덕분에 자신의 적성에 맞는 과목을 선택하여 공부하거나, 혹은 자신과 맞지 않는 과목은 피해버리는 식으로 취사선택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입시'라는 똑같은 목표를 향해 꼭두각시처럼 달려나가는 모습은 모두가 똑같다. 그저 눈 굴림이, 손가락 움직임이 조금씩 다를뿐, 지구 밖의 별에서 본다면 다들 책상에 앉아 문제를 푸는 모습은 모두 똑같을 것이다.
나는 그런 형식적인 공부가 싫었다. 언제부턴가 공부가 입시와 직결되기 시작했다. 영어 수업은 회화가 아닌 독해와 추론 중심의 수업으로 변해갔고, 과학도 어느샌가 실험이 사라지고 개념만 주구장창 암기하는 식으로 변질되어갔다. 공부에는 목적이 없었다. 그나마 표면적인 목적이 있다면, 오로지 대학 뿐이다. 이 사회가 우리에게 그렇게 요구하는 입시의 지옥.
고양국제고도 이러한 거시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교과서와 수능특강 위주의 개념 학습 및 문제풀이가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차이점이라면 발표와 토의, 토론 수업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고양국제고에 지원할 때만 해도 이런 것들이 모두 멋있어보였다. 그러나 환상은 금방 깨졌다. 그런 토의와 토론 수업마저도 점수와 직결되고, 대입에 영향을 미쳤으니까. 모든 게 다 대입 때문이다. 그놈의 대입. 대입. 그래서 assignment? 과제..대입..
나는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싫다. 도대체 학생들에게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선택과목을 많이 만들어도 그건 학교와 교사들의 역량이다. 기껏 개설해도 학생수가 적어서 폐강되는 경우도 있다. 수학은 중요한 내용은 싹 다 빼버리고 선택과목이라는 명분으로 과목을 다 쪼개어놓고, 통합과학은 무슨 우주의 탄생부터 장엄하게 시작하는 척, 물/화/생/지가 뒤죽박죽으로 섞여있고. 학생들의 재량을 봐주기 위한 거라면 좋다. 그런데 어차피 기승전수능이잖아.
그래서 학교 공부에 얽매이는 게 싫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었다. (그 전엔 화학자였다. 어쩌면 내가 화학에 미쳐 사는 것도 그 이유가 아닐까) 중학교 때 여러 언어를 독학하고, 고등학교에서는 그 지식을 바탕으로 상용 앱을 개발하여 출시했다. 그게 GGHS Time Table이다. 누구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누구도 수량화해서 평가하지 않았다. 순수한 나의 호기심과 즐거움, 그것이 나를 움직인 원동력이었다. 사회탐구방법도 마찬가지. 비록 수행평가였다는 한계는 존재하지만, 선생님과의 의견 충돌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까지 연구 주제를 설정했고 데이터과학과 사회탐구방법론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훌륭한 연구를 마쳤다. 이 둘만큼은 내가 영혼을 갈아 넣은, 자유롭게 나를 펼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지필평가는 말아먹었다.
수시 원서 접수가 끝나고, 약 1달여간의 공백기가 찾아왔다. 다음 일정이 오기까지 약 23일 정도가 남았다. 무슨 깡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저 없는 전형으로 절반은 인문, 절반은 자연으로 지원했다. 수리면접이 있는 학교가 있어서 요즘에는 수학이랑 화학 공부하느라 바쁘다. 사실 1차도 못 붙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긴 한데, 그래도 날 믿는다. 그리고, 설사 이것이 헛된 노력이라고 하더라도 가치는 있을 거라 본다. 적어도 후배들한테 얘기할 수는 있겠지. 내가 3학년 2학기에 기하와 확통, 화학 II를 벼락치기로 공부했다고. 시험에서의 벼락치기는 별로 좋은 뜻은 아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면접을 대비해서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을 빠르게 공부하는 거니까.
기하를 펴면 처음부터 이차곡선 -- 포물선, 타원, 쌍곡선 + 초점, ... -- 이 화려하게 나를 감싼다. 첫 페이지부터 머리가 아픈 과목은 처음이었다. 분명 난이도는 미적분보다 낮은데. 식은 더 복잡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벡터가 나오는 순간부터는 날아다녔다. 한때 벡터에 빠져서 벡터를 공부해 본 적이 있다. 기하가 아니라면 배울 수 없는 도형, 그리고 특이한 연산.

그리고 그 결과는... 위와 같다. 궁금하신 분들은 '고양국제고 내적 갈등'이라고 유튜브에 치면 나온다. 쉽게 설명하자면 GGHS에서 벡터 GG는 영벡터이므로 내적해도 0 나온다는 소리.
화학 II 는 작년부터 공부했다. 화학 I 수업이 끝나자마자. 선생님께서 "가역반응을 적당히 조절해서 비가역처럼 만들 수도 있다. 그건 화학 II 에서 배운다."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았다. 그게 너무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게 르샤틀리에 원리를 통한 화학 평형의 조정이었다는 것을 (Q - K) 깨달았다. 뭐, 촉매를 쓸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화학 II 는 너무 재미있다. 대학 가서도 이공계로 간다면 꼭 일반화학을 배우고 싶다. 그런데 난 생물학은 싫다. 너무 싫다. 암기해야 하는 게 귀찮다. 유전은 재밌긴 했는데, 다른 건 별로. 제일 재미 없는 건 지구과학이다. 지구과학에 대한 욕을 한껏 쓰고 싶지만 지구러들도 있을테니 말을 아끼겠다.
여튼, 난 화학 좋아해.
요즘엔 내 자신이 너무 힘들 때 스스로를 세뇌한다. 억지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웃어보자고.
"기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화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학"
...... 어쨌든. 근데 둘 다 재밌다. 단순 문제 풀이는 재미 없는데, 개념 공부가 너무 재밌다. 이걸 응용해서 새로운 것들을 추론해보고 분석하고 엮어보는 과정이 흥미롭다. 요즘은 물건을 보면 물건 그 자체가 아니라 분자 구조가 보이는 듯하다. 화학에 미친 사람. 나중에 플러팅할 때 나는 무슨 말을 할까. '내 원자가 전자를 줄테니 너의 원자가 전자를 함께 공유하자' 내지는 '너의 전기음성도가 너무 커' 따위의 말을 하면 망한다.
여튼, 요즘은 사는 게 너무 행복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있어서. 인문학도 좋다. 언어학도 좋다. 그렇지만 나는 이공계열이 더 적성에 맞는다. 국제고에 와서 좋은 경험을 했다. 과학고에서 바로 이공계열로 진학하는 게 훨씬 쉬웠겠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한 번쯤 "문과의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인문학이란 무엇인지. 기술자들에게 왜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하는지. 고양국제고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내가 이곳에 들어왔던 목표대로, 나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프로그래머가 될 것이다. 문이과 모두를 겪어본 입장에서, 둘 중 뭐가 더 어렵냐는 건 의미 없는 질문이다. 중요한 건 내가 무엇을 공부할 때 가슴이 뛰는가이다. 화학 공부하다보면 가끔씩 울 것 같다. 너무 재밌어서. 너무 기뻐서.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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