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aru's .../Karu's Story

긍정적 대상관계로 상대방 바라보기

by 카루 (Rolling Ress) 2022. 2. 12.
반응형
 

환영합니다, Rolling Ress의 카루입니다.

오늘 글은 많이 어려워요. 심리학적 내용이 상당히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뭔 소리야?' 같은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물론 제가 심리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전문 지식이 있는 건 아니니까, 가볍게만 하고 넘어갈 겁니다. 문제는 그게 그렇게 가볍지가 않다는 거.


관계의 패러다임

상대를 100%로 이해하는 게 가능할까요? 언제나 예외는 있겠지만, 저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요. 자신과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과연 그 사람에게 내가 1순위일지는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요. 알 수 없으니까. 그냥 사물을 보면 단순하게 겉을 관찰하면 되는 문제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 못하죠.

겉모습은 쉽게 알 수 있어요. 그냥 쓱 둘러보면 되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의 내면이죠. 인간의 내면. 그 사람의 생각이나 가치관, 행동 등이요. 상대가 말해주는 상대 자신의 모습에도 표현하기에 한계가 분명히 있고, 그 상대를 오랫동안 관찰한다고 해도 모든 걸 알 수는 없어요. 모든 상황을 지켜볼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내적으로 상대를 '묘사'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예를 들어서, 다음과 같은 세 명의 인물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라에: 평소에 침울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자주 보임. 그러나 속은 항상 따뜻함.

실비아: 라에에겐 따뜻하게 대함, 키아나에겐 차갑게 대함.

키아나: 겉과 속이 동일하게 무뚝뚝한 사람.

여기서 라에는 겉과 속이 다르고, 실비아는 사람에 따라 행동이 다릅니다. 키아나는 겉과 속이 똑같죠. 이 셋을 상호작용시키면, 각각의 인물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라에: 실비아는 따뜻하고, 키아나는 무뚝뚝해.

실비아: 라에는 우울한 사람이고, 키아나는 무뚝뚝한 사람이야.

키아나: 라에는 우울한 사람이고, 실비아는 차가운 사람이야.

라에는 실비아의 단편적인 모습을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실비아는 라에의 속을 모른 채 라에게 우울한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 버렸군요. 라에, 실비아 모두 키아나가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맞죠. 물론 키아나의 겉과 속이 100% 일치한다는 전제 하에. 반대로, 키아나는 실비아의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차갑다고 결론지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걸 알고 있으니, 이들이 대부분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는 걸 알 수 있죠.

이런 거예요. 우리가 상대를 판단할 때 과연 그 상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우리는 상대를 마주할 때 상대의 전체를 판단의 기초로 삼지 않아요. 우리가 멋대로 만들어낸 상대의 사본을 바탕으로 상대를 해석합니다. 여러분이 보는 카루는 어떤 사람인가요? 블로거? 유튜브? 잘 해봐야, 제가 블로그에 올리는 글들 내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들이겠지요. 그 밖의 모습은 제가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여러분이 경험하지 않았으니까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이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겠어요. 물론, 사람을 좋아하고 누군가의 내면을 관찰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남들에 비해 좀 더 많이 알 수는 있을 거예요. 그래도, 한계는 존재합니다. 그 사람의 트라우마, 밝히고 싶지 않은 과거까지 여러분이 캐낼 수는 없어요. 극단적인 경우 그러한 행위의 시도 자체가 상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군가와 상호작용할 때 그 사람의 일부를 보고 소통한다는 점입니다. 그게 긍정적인 면이든, 부정적인 면이든.

대상관계

위에서 설명한 것들이 제가 설명하고자 한 '대상관계'에 대한 예시입니다. 대상관계란, 대상object과 가지는 관계를 뜻합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주변과의 관계를 그려낸 나만의 내부 모형"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네요.

* 대상관계에서의 '대상'은 성적인, 혹은 공격적인 에너지가 결부되어 있는 심리적 표상을 말합니다(위서현, 2016). 여기서는 대상을 확장하여 주변인들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설명하겠습니다.

모든 관계의 시작은 역시 부모죠. 위 그림은 대상관계를 나타낸 그림입니다. 여기서 보이는 A (큰 원)는 부모와 맺은 관계를 내면화시킵니다. A의 안에선 A의 캐릭터를 그려낸, 자기 표상(C)이 존재합니다. A의 내부에는 대상표상으로 가득 채워져있어요. 이것을 통해 타인과 교류하기 위한 바탕이... 에, 머리가 아프시다고요?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선 부모와의 연관은 떼고 설명할게요. 중심은 카루입니다. 카루의 내면에는 라에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라에를 100%로 추종한 인물은 아니고, 그저 카루가 보는 라에를 바탕으로 본뜬 상(image)이에요. 쉽게 말해서, 카루가 생각하는 라에를 자신의 내적 세계에 그려낸 거라고 보면 됩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투사(projection)예요. 그렇게 해서 카루가 내적 세계에 라에를 그려놨으면, 그걸 토대로 현실의 라에를 해석합니다. 실질적으로는 라에라는 인간의 껍데기에 카루가 생각하는 라에의 모습을 덧씌워 상호작용하는 거라고 볼 수 있죠. 이거 말로 하니까 굉장히 무서운데요. 무슨 가상현실도 아니고...

여하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 라에와 카루에게 맺힌 라에의 상은 다르다 라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상대의 모습이 정말 그 상대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이걸 깨닫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어떤 사람들은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죠. 저도 그렇게 착각했으니까. 그런데, 단순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그 사실을 바탕으로 상대를 이해하는 데엔 생각보다 꽤 많은 차이가 있더라고요.

카루의 내면에는 현실의 카루를 투영한, 카루가 보는 카루(자기표상)가 존재하죠. 외부 현실 세계에서 '현실의 카루'는 '현실의 라에'와 관계를 맺지만, 카루의 내부 세계, 즉 대상표상들로 채워진 카루의 내부 정신세계에 있는 라에의 대상표상과 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 심리학, 특히 정신분석학에 대해 자세히 알고 계신 분들께서는 제 설명에 빈틈이 많다는 걸 금방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맞습니다. 본 글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대상관계의 개념을 이용한 것이기에, 실제 정신 분석에서 사용하는 대상 관계론과는 부분적인 불일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위 '카루와 라에의 관계'에서 부모를 떼어내고 설명했는데, 대상관계론에서는 부모의 역할이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 글에서 부모의 대상화와 분리-개별화(separation-individuation)까지 설명하기엔 제가 원래 설명하고자 한 글의 내용이 왜곡될 것 같아 기술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위 문단은 아래 논문을 참고하였습니다.

1) 김창대, 2002, "대상관계이론의 핵심개념", 한국심리학회 연차 학술발표 논문집 2002년 제1호, 125-131

2) 위서현, 2016, "대상관계이론을 중심으로 본 작가 이상과 그의 작품세계", 연세상담코칭연구, 5, 193-216

상대방을 바라보는 법

대상의 일부를 부분 대상이라고 하고, 대상의 전체를 전체 대상이라고 합니다. 부분 대상을 전체 대상으로 통합시킬 수 있을 때, 심리적으로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표현합니다. 이걸 위에서 들었던 예시에 다시 적용해볼게요.

라에: 평소에 침울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자주 보임. 그러나 속은 항상 따뜻함.

카루는 라에의 모습을 보고 라에에 대한 대상표상을 만들어냅니다. 카루 마음 속에 있는 라에는 그저 늘 우울하고 무기력한 인간이겠죠. 그렇지만 그게 라에의 본 모습인가요? 아니거든요. 침울한 모습도 라에의 부분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걸 전체 대상으로 확대 해석하면 안 돼요.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의 전체에서 부분을 분리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게 대인 관계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스트레스를 경감시켜주더라고요.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특히나 저처럼 애착 유형이 불안형인 사람들에게 더 맞지 않을지.

중요한 건, 상대에게 나의 패러다임을 함부로 씌우면 안 됩니다. 그럼 결국 자기가 만들어낸 편향에 갇히게 되는 꼴이거든요. 건강하지 못한 대상관계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상대의 모습이 상대의 본 모습이 아닐 수 있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 사실을 알아요. 적용하기 힘들어서 그렇지. 타인을 이해하는 첫 걸음이 아닐까 싶어요.

제 고질병이 하나 있습니다. 상대가 나에게 대하는 태도가 이전과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저를 싫어한다고 멋대로 생각해버리는 거예요. 뭔 미친 소리인가 싶죠. 그런데 저는 제가 계속 언급하지만, 누군가의 배경엔 필연적인 역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떤 안 좋은 기억이 지금의 저를 이렇게 만들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만 그것도 결국 제가 만들어낸 부분대상일 뿐인걸요. 상대의 행동 하나하나를 자신에 대한 평가 척도로 삼지 말란 말이 있습니다. 만약에 상대가 갑자기 나에게 퉁명스럽게 대한다.. 그럴 수 있죠! 그날 따라 피곤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사람과 싸웠을 수도 있고, 아플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모습은 상대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상대의 전체가 아니에요. 물론, 내가 만들어낸 상대의 모습, 즉 나의 내면에 있는 상대의 대상표상과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괴리감이 느껴지는 건 당연합니다. 그래도, 상대의 또 다른 부분을 마주했다면 내가 갖고 있는 프레임을 억지로 덧씌울 게 아니라 기존에 형성된 대상표상을 수정해야 할 필요도 있는 셈입니다.

고민상담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의 고민을 들어줄 떄, 상대의 약점을 알게 되거나 어두운 면을 보게 되면 마음이 썩 편치는 않을 겁니다. 물론 마음을 나쁘게 먹는다면 그걸 악용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을게요. 어쨌든, 상대의 새로운 모습을 보면, 그건 그냥 그 상대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넘기세요. 그것 때문에 괜히 상대에 대한 환상을 깨부순다던가..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봐왔던 것도 상대의 일부고, 지금 마주하는 모습도 일부일 뿐이니까요. 인간관계에 절대적인 게 있을까요?

한동안 저도 제 안에 여유가 없었어요. 주변 사람에게 관심도 없었고요. 그런데 점점 생각이 바뀌어가는 듯 합니다. 나에게 차갑게 굴던 사람, 태도가 변한 사람, 피해를 주었던 사람들. 모두가 힘들었구나. 내가 못 보던 모습이 있었구나. 내가 알고 지내던 네가 전부가 아니구나. 이런 생각이 자꾸 들더라고요.

제가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은 이유는 그거예요. 사람에 대한 이해를 하고 싶어서. 앞으로, 제가 사회에 진출하게 되면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많은 관계를 그려나갈 텐데, 인간관계를 모두 공식화해서 풀어나갈 순 없잖아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조금이라도 상대에게 마음을 더 열기 위해 사람에 대해 알아가고자 합니다.

반응형

'Karu's ... > Karu's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언의 충돌, 끝없는 고민  (0) 2022.09.09
우주상향이 가능할까요?  (0) 2022.09.09
계속 기대면 넌 싫어할 거잖아?  (0) 2022.02.05
불합리한 상대평가 속에서도  (0) 2022.01.30
공동체에 대한 책임  (0) 2022.01.30


같이 보면 좋은 글


댓글